경기방송에서 일하는 한 PD가 쓴 글을 붙입니다.
글이 좀 길기는 하지만
제 마음을 담은 것 같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기업은 한국농업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대학원에서 '토양학'이라는 농업분야 연구를 하던 시절, 딱 두 차례 대기업 사원이 될 뻔한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당시 국내 넘버원이었던 H그룹 간척지 연구소. 물론 간척지 토양을 농경지로 활용할 수 있도록 연구한다는 공익적 의미가 있긴 했습니다만 문제는 연구자가 다뤄야 할 토양은 농민의 땅이 아니라 그룹 창업주가 간척한 H그룹의 땅만 다뤄야했다는 사실. 두번째 기회는 또 다른 Hs그룹의 '제지부산물 프로젝트'였습니다. 수입목재를 들여와 종이를 만드는 대기업의 골치거리는 엄청난 제지부산물인데, 이걸 어떻게 토양개량제로 재활용할 수 있을지 연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공익적 의미는 있었고 그 회사의 사내복지는 국내 탑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면..어쩌면 그 연구는 농업이나 환경문제 해결에 일익을 담당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환경을 망친다는 오명을 씻을 수 있을 정도'만큼만 연구하는 것일수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일까 대기업 식구가 되었던 관련 분야 선배 동료는 기업이 원하는 만큼을 충족시키자 쉼없는 '수익모델 개발' 스트레스에 휩싸였고 심한 경우 퇴사에 이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민간이 농업연구를 하는 데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삼성경제연구소'라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을 수 있지만, '삼성농업연구소', '현대농업연구소','엘지농촌연구소'라는 말은 들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기업의 CEO들이 부도덕한 사람들이어서, 농촌출신이 아닌 도시출신이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농촌을 사랑하는 CEO를 앉힌다 한들 한국 농업과 농촌이 처해있는 불확실성(농업분야 고유의 비탄력성 완전개방체제 영세소농 구조)에서는 농업농촌분야 R&D(연구개발)에 대해 한 푼도 제대로 투자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는 겁니다. 딱 하나..정부만 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나마 정부마저도 당선된 지 한 달만에 농업연구기능을 내팽개친다고 합니다. 이른바 '농촌진흥청의 정부출연연구소 전환'. 말이 좋아 정부출연연구기관으로의 전환이지 속내는 '더이상 나랏돈으로 농업연구 지원할 수 없으니 너희들 연구비는 너희가 알아서 챙기라'는 메시지입니다.

좋습니다. '작은 정부'를 위해, 그리고 시장경제와 수요자부담의 원칙에 따라 농업연구자들이 농가부채에 허덕이고 계신 농촌어르신들을 찾아가 '현장애로기술연구'를 위해 십시일반 연구비를 모아달라고 해야한다면 여러분 동의하시겠습니까? 낮은 재정자립도에 허덕이는 지자체 시장군수님들에게 연구자들이 매달려야한다면...연구비 자원을 찾다찾다 결국은 '카길'과 같은 다국적 기업에게 매달려 연구비를 타내야한다면 그 연구는 '우리 쌀'이나 '한우'를 위한 연구일수 있을까요? 앞으로 친환경 농산물 생산을 위한 연구비 발주를 위해서는 홈플러스나 이마트를 찾아가야할까요?

농업분야 연구개발업무는 '오해'가 아닌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우선 바로잡을 게 있습니다. 특히 방송 3사를 비롯한 기자님들, 그리고 정치인 여러분들, '농업진흥청'이 아니라 '농촌진흥청'입니다. 엊그제 정부 외청가운데 유일하게 없어진 외청의 명칭은 '농업진흥청'이 아니라 '농촌진흥청'이라는 겁니다. 언제 이름이 바뀌었냐고 물으신다면 정확하게 47년 전부터 그 이름이 쓰여져왔음을 말씀드립니다.

헷갈리신다고 말씀하신다면 '농촌진흥청'이란 이름을 전혀 헷갈리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분들의 명단을 말씀드립니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며 농업을 천직으로 여기는 분들, 남들 다 떠나는 고향농촌을 어떻게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분들, 그리고 도시를 벗어나 농촌에서 제 2의 삶을 개척하려는 귀농인들의 가슴속에는 헷갈릴 수도 간과할 수도 없는 단어가 바로 '농촌진흥청'이라는 다섯글자입니다.

일제 강점기 36년, 그들이 이 땅을 대륙침략을 위한 식량기지로 여기던 시절 '농촌진흥청'이란 단어는 없었습니다. 대신 조선총독부 산하 '농사시험장'만이 있었을 뿐. 한국전쟁이 끝나고 혼란을 넘어 1962년 그 지긋지긋한 '보릿고개'를 넘어서고자 대한민국의 농업과 농촌을 대한민국의 연구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기반시설통합이 이뤄졌을 때 비로소 '농촌진흥청'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70년대 통일벼를 비롯한 다수확 품종개발로 드디어 보릿고개를 넘어섰을 때, 80년대 추운 겨울에도 푸른 채소를 먹을 수 있는 비닐하우스 기술보급이 이뤄질 때 농촌진흥청이 있었습니다. 90년대 시장개방의 거센 파고 속에 누가 수입농산물에 맞서 '고품질 친환경농산물'을 내놓을 것인가라는 사회적 물음에 답할 수 있었던 몇 안되던 보루가 바로 농촌진흥청이었습니다.

'농진청이 한 게 뭐있냐'라고 물으신다면 이 부분을 검색해보시기 바랍니다.

옛추억으로나 잊혀져가던 누에농가와 뽕밭이 어떻게 해서 당뇨예방을 위한 건강식품 자원으로 될 수 있었는지. 우리 꽃 농가들이 외국 종자회사들의 거액 로열티 지불 요구에 걸려 허덕일 때 국산 장미와 국산 국화품종을 개발해 민간에 이양한 곳이 어디였는지 말입니다.

모두가 친환경 농법을 주창하며 값비싼 일제 미생물 제재를 앞다퉈 수입할 때 토종 미생물 연구와 천적농법 등 실질적인 친환경 농법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주도한 곳은 어디였을까요? 모두가 웰빙과 신토불이를 외칠 때 우리 소비자들이 먹는 고기가 진짜 한우가 맞는지 아니면 젖소인지 국적불명의 수입소인지를 DNA 검사를 통해 정확히 판별할 수 있도록 검증방식과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곳이 어디였는지, 그리고 제 2의 삶을 농촌에서 꿈꾸는 도시민들이 최신 농업기술 동향을 무료로 친절하게 접하고 안내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과연 어디인지 말입니다.

그리고 남북정상회담 끝난 직후 식량부족에 허덕이는 북한의 농업연구자를 만나 남과 북이 함께 하는 '통일농업시대'를 국가연구기관 차원에서 준비할 것을 합의하고 토양, 농자재, 품종개발, 농기계 등 종합적인 차원의 남북농업기술협력을 주도하는 연구기관이 과연 어디인지 말입니다.



이제는 정부연구기관도 바뀌어야 한다고 외치시는 분들께 묻겠습니다.

정부연구소 가운데 기업도 너나할 것 없이 뛰어드는 '돈되는 분야'에서 실적을 올리는 연구소와, 기업들은 뛰어들지 않지만 공익적 가치가 높은 분야에 뛰어들어 '돈이 될 수 있게 만드는' 연구소가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연구소가 진정한 정부연구소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돈안되는 분야에 뛰어들어 돈이 될수있도록 한 뒤 민간에게 이양하는 것이 정부연구소의 숙명일 것입니다. 때로는 돈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누군가는 국민을 위해 연구해야하는 분야를 짊어지는 것이 정부연구소의 숙명이기도 합니다. 농촌진흥청이라는 존재 자체가 국민들의 머리속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서가 아니라 '거위가 황금알을 낳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말없는 존재일 수 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농사꾼은 굶어죽더라도 종자를 베고 죽는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강제로 북간도로 보내지던 열차에서 우리 선조들은 극심한 식량난과 영양실조에 허덕이면서도 볍씨(종자)가 담긴 가마니만은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종자는 한 나절 끼니거리도 안되는 탄수화물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농민에게는 미래의 희망이고 가족이며 생명이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네 선조들은 굶어죽더라도 종자를 베고 죽었던 것입니다.

농업연구는 우리 농업 농촌에 있어 종자이자 희망입니다. 진정 우리 농업을 사랑하고 농촌의 중요성을 가슴에 담는 이들에게는 그 희망의 가치가 뚜렷이 보입니다. 비록 싹이 나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로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속이 꽉찬 열매로 보답하리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경제논리를 앞세워 우리네 농촌을 포기하고 농업을 내주는 게 효율적이라고 하는 분들 눈에는 그 종자가 그저 '돈먹는 하마'로 '2천여 철밥통들의 근거지'로만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 보기 좋자고, 공무원수 7천명 절감이란 수치놀음 맞추자고 종자를 통째로 삶아먹을 수는 없는 법, 농촌진흥청은 시장에 내버려질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존재를 보장하고 외부로부터의 개혁강요가 아닌 내부로부터의 혁신을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1. 농민이 피해를 봅니다 : 농민은 대한민국의 국민이자 생명산업을 담당하는 중소기업입니다. 그런 농민이 국가로부터 당연히 받아온 서비스를 받기 힘들게 됩니다. 이미 기업은 한국의 농산물이 아닌 수입농산물을 연구하고 있고, 대학은 소똥묻은 농민의 손보다는 새하얗고 두툼한 기업의 손을 일찌감치 잡았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 농촌진흥청마저 폐지될 경우 한국의 농민을 위한 연구개발 및 기술지도 서비스를 공적인 영역에서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국민이 피해를 봅니다 : 현대 농업연구의 흐름은 생산자인 농민 혹은 농기업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던 '파괴적 농업, 공업형 농업'으로부터 벗어나 이제는 소비의 주체인 도시 소비자의 관점을 반영한 '지속가능한 농업' '환경과 조화로운 농업'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추세에서 농업연구가 나랏돈이 아닌 민간자본으로 충당되어야 한다면 농약과 비료를 덜쓰는 저투입 농법 연구비를 농약회사가 부담하려하겠습니까 비료회사가 부담하려 하겠습니까?

3. 우리 후손들이 피해를 봅니다 : 이미 도시민들의 꿈은 노후를 공기좋고 물맑은 시골에서 보내는 것입니다. 아마도 환경오염과 과밀화가 더 심각해지는 우리 후손대에 가서는 그 비율이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공간인 '농촌'이 벌써부터 모두들 떠나버리고 다 파헤쳐지고 남은 것은 러브호텔과 땅투기꾼의 천국으로 변해버리며 농촌을 연구하던 사람들마저 뿔뿔히 흩어져야한다면 도대체 우리 아들 딸들에게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이미 20여년전부터 서유럽을 중심으로 OECD 선진국들의 정부연구기관들은 '농업중심 연구'로부터 벗어나 '농촌보존형 연구'로 중심축을 옮겨왔습니다. 농촌에 젊은 사람들이 이사를 가서 아이를 키울 수 있을 만큼 복지와 의료, 교육기반이 충실해야만 국토가 균형발전되고 환경보전을 싼값에 할 수 있으며 사람들의 진정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그들의 판단입니다.

4. 결국은 '경제를 망치는' 길입니다 : 경제전문가들은 올들어 국제적인 유행어로 떠오르고 있는 '농산물 펀드'라는 용어의 의미를 잘 알고 계실것입니다. 왜 우주선이 날아다니는 21세기에 농산물일까요? 지구온난화와 식량위기가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선진국일수록 자기 나라 농업과 농촌에 투자하고 국민소득이 높아질 수록 농업연구개발 투자가 늘어나는데, 어찌된 게 우리나라의 경우 선진국으로 향할 수록 농업을 포기하고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농업연구개발을 떼어내지 못해 안간힘을 쓰니 이것이 과연 선진국으로 가는 징조입니까 아니면 거품경제로 가는 징조입니까?

대통령직 인수위는 다시 한번 농촌진흥청의 폐지 결정을 원점에서부터 재검토하시길 촉구합니다.
굶어죽더라도 종자를 베고자던 우리 민족과 국민의 얼 앞에 '굶어죽지도 않으면서 종자만 먹어치웠다'는 오욕에 찬 비난을 받기 싫으시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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