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오늘도 날씨가 무척 더울 거라고 합니다. 여름이니까 덥겠죠? 더위를 쫓으려고만 하지 마시고, 더위와 함께하는 것도 건강에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며칠 전에 한겨레 신문에 실린 칼럼을 같이 읽고자 합니다.
고맙습니다.
말길이 바로잡혀야 한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9746.html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이른바 ‘인문학’의 물결을 타고 주검으로 떠내려가는 우리말이 어디에나 그야말로 ‘시산시해’, 산처럼 쌓이고 바다처럼 널브러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아무 때나 한다. 상스러운 말은 거개가 우리말이다. 같은 상스러운 뜻을 지니고 있어도 힘센 나라 말은 상스럽지 않다. 힘 있는 사람이 입에 담아 버릇하면 상스러운 말도 본받을 말이 된다.
‘좆’은 상스럽게 들리지만 ‘음경’이나 ‘페니스’는 ‘학술적’이고 ‘교양’ 있게 들린다. 물 건너온 말이기 때문이다. 힘센 나라에서 힘 있는 사람들이 모셔온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좃’(우리 마을 ‘표준말’로는 ‘좆’이 아니고 ‘좃’이다)이 처음부터 상스러운 뜻으로 쩔어 있었을까? 아니다. 사람 얼굴에서 솟아오른 데가 어딘가? 코다.‘코’의 옛말은 ‘고’다. 이곳저곳할 때 ‘곳’도 솟아올라 눈에 잘 띄는 자리를 가리켰다. 요즘에 입에 자주 오르는 이른바 ‘랜드마크’(landmark)다. ‘파리’의 ‘에펠탑’, ‘맨해튼’의 ‘자유여신상’…….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뭍도 ‘곳’이다. ‘장산곳’ 하면, 굳이 ‘매’를 떠올리지 않아도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어느 나라 말에나 홀소리는 쉽게 바뀐다. 아, 어, 오, 우, 으, 이는 서로 소리바꿈을 해서 하늘을 가리켰던 옛 우리말 ‘검’은 ‘감’도 되고, ‘곰’도 되고, ‘금’도 되고, ‘김’도 되고, ‘굼’도 되었다. 중국이나 이 땅이나 예로부터 밤하늘을 하늘이 띠는 제빛 하늘이라 하여 ‘천’(天)이 ‘현’(玄)이요, ‘하늘’이 ‘검’이었다는 뜻풀이는 ‘천자문’(千字文) 맨 앞자리에 나온다. (‘하늘’ ‘천’ ‘따’ ‘지’ ‘감’을 ‘현’ ‘누르’ ‘황’(天地玄黃)은, 여기서 우리말 소리만 따로 떼내면 ‘하늘’은 ‘감’(검)이요, ‘따’는 ‘누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쉬운 소리바뀜 때문에 말뿌리를 캐는 ‘어원학자’들은 ‘모음’(홀소리)을 한쪽으로 제쳐놓고 때와 곳에 따라 바뀜이 덜한 ‘닿소리’(자음)에 눈길을 돌린다. 그러나 닿소리라고 해서 아예 안 바뀌는 것은 아니다. ‘ㄱ’은 곧잘 ‘ㅈ’으로 바뀐다.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다. ‘언어학자’들은 이것을 ‘식민본국’에서 들여온 말로 ‘구개음화’라 일컫는다.
이쯤 하고 이제 다시 상스러운 소리로 돌아가자. 가슴에서 솟아오른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암컷’ 가슴을 떠올리면 훨씬 알기 쉽다.) ‘젖’이라고 한다.(우리 마을 말로는 ‘젓’이다.) ㄱ→ㅈ, ㅗ→ㅓ. 젖가슴은 가슴에서 솟아오른 ‘곳’이다. 다른 뜻 없다. 굳이 ‘유방’이라고 부를 것 없다. ‘젖가슴이 눈길을 끌면’ 더 상스럽고, ‘유방이 매혹적이면’ 덜 상스러운가?
왜 이 거룩한 자리(?)에서 이딴 흰소리를 늘어놓고 있는가?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이른바 ‘인문학’의 물결을 타고 주검으로 떠내려가는 우리말이 어디에나 그야말로 ‘시산시해’(屍山屍海), 산처럼 쌓이고 바다처럼 널브러져 있기 때문이다. 말과 글은 ‘언어’라고 해야 꼴값을 하고 ‘이야기’는 ‘담론’으로 입에 올려야 주고받을 만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이 ‘유식’한 ‘언중’들이 세살배기 어린애도, 까막눈인 할머니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고, ‘좋음’과 ‘나쁨’을 갈라세울 수 있는가? 날이면 날마다 ‘진리’가 무엇이고 ‘허위’의식이 어떻고, 글이면 글마다 ‘선’이 어떻고, ‘악’이 어떻다고 괴발개발 끼적이는 이들을 ‘언어의 식민화’에 앞장서는 ‘식민지 지식인’이고, ‘이념적 국가기구의 하수인’이라고 들이대면 뭇매를 맞을 세상이 되었다.
그래도 고지식하게 묻겠다. 이 땅의 ‘지성인’들에게 묻겠다. ‘어 다르고 아 다르다’는 말 들어본 적 있는가?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 열에 아홉은 ‘소리가 다르잖아’, ‘목청 높이지 말고 자분자분 이야기해야 한다는 뜻 아냐?’라고 얼버무리거나 에둘러 우물거릴 게 뻔하다. 가장 쉬운 우리말 뜻조차 모른다. 잊어버렸다. 잃어버렸다. ‘차이’와 ‘차별’의 뜻이 다르다는 것은 미주알고주알 섬길 수 있어도 ‘어’ 다르고 ‘아’ 다른 것은 모른다. 듣고도 모르고 보고도 모른다. 말의 ‘종살이’가 이 지경이 되었다.
‘언니’, ‘아우’, ‘어른’, ‘아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지금’의 우리말이 ‘이제’이고, 오늘보다 하루 앞선 날이 ‘어제’인 것을 모른다고 할 사람도 없겠지. 그러나 한자말 ‘내일’(來日)에 짓밟힌 우리말은 무엇이었을까?‘아제’였지. 뭉개고 짓밟아 없애버렸지. 그래도 흔적마저 지울 수는 없었지. 그래서 ‘아직’이라는 말로 되살아날 날을 기다리고 있지. ‘때’를 가리키는 우리말 가운데 ‘이’는 ‘현재’를, ‘어’는 ‘과거’를, ‘아’는 ‘미래’를 나타내고, 따라서 ‘어’는 앞선 것을, ‘아’는 뒤선 것을 드러낸다는 것은 옛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사투리’라고 깔보이는 ‘각 지역 표준말’에도 살아 있다. 그런데도 대학에 교수로 자리잡고 있는 ‘국어학자’, ‘언어학자’들은 거개가 제 땅에서 움돋고 자란 말의 뿌리를 찾을 생각은 않고, ‘말’이 ‘말’ 타고 들어온 저 우랄알타이, 몽골, 말갈의, 이제는 모래벌판으로 바뀐 저 ‘언어의 식민본국’에만 눈길을 돌리고 있 다. 그야말로 ‘언어의 유목민’들이 힘센 나라의 낯선 말들을 쌓아올린 ‘천 개의 고원’을 넘나들고 있다. ‘말’을 ‘말’로 삼아.
<울고 싶도록 서글픈 한국어학의 현실>을 쓴 최한룡 선생을 아는 대학교수가 몇 분이나 있을까? ‘말소리’를 ‘글자’로 제대로 옮기려면, 기계에 맡겨도 ‘음성언어’가 ‘문자언어’로 ‘자동입력’ 되려면 소릿값이 같아야 한다. 우리말 사전에 오른 낱말 가운데 열에 일곱은 ‘한자’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가져다 쓸 수밖에 없었던 이 중국말의 소릿값을 우리말의 소리 높이와 길이에 맞추어 제대로 내려고, 그래서 ‘한자음’을 ‘표준화’시키려고 애써온 임금들이 있다. ‘훈민정음’을 펴낸 세종이 <동국정운>을 엮었고, 정조는 <규장전운>을 책으로 묶었다. 이 ‘발음사전’에 실린 한자말의 소릿값이 제대로 지켜져야 이 말 다르고 저 말 다르게 받아들이는 일이 없겠다는 생각에서였겠지.그 뒤로 200년도 훌쩍 넘게 흐른 오늘 이 땅에 제대로 된 ‘발음사전’이 나온 적이 있는가? 없다.
최한룡 선생은 ‘학자’가 아니다. 1926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나이 스물에 대구상업학교를 나온 것이 마지막 ‘학력’이다. 그 뒤로 초등학교 선생, 금융조합 서기, 농업은행 은행원, 제조공장 노동자, 판매회사 사원, 광산 일 들을 닥치는 대로 하다가 쉰여섯에 일자리를 잃은 분이다. 이이가 한 말을 이 자리에 옮긴다. “국어학과를 졸업한 국어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국어학계의 오류들이 눈에 띄었다.” “이 말은 한국에서는 역설이 아니라 직설이다.” 이이가 1300쪽이 넘는 큰사전 크기의 책 머리에 적어놓은 글을 보자.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나온 소위 국어사전이라는 것들과 한국어 발음 사전이라는 것들로서 음의 장단 표시를 해 놓은 것들은 한자음의 발음에 관한 한, 예외없이 음의 장단에 있어서 50%를 훨씬 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엉터리들입니다.”
“우리나라 국어학계라는 것이 반세기가 지나도록 평온무사하게만 보이는 것은 학문적인 모순이 전무해서가 아닙니다. 기본적인 기초이론에 있어서도 엄청난 모순을 안고 있지만 학계라는 것이 수준 낮은 엉터리들로만 이루어진 총체적인 엉터리여서 아무도 모순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순이 없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이이가 이 책을 낸 해는 1999년, 나이 일흔넷일 때였다. 아직도 살아 계신다면(1926년생이니까)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이겠지. 이렇게 우리는 ‘학력미달’로 뛰어난 ‘학문적 업적’을 쌓고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이에 이미 죽었거나 죽음을 앞둔, 먼저 깨친 이들의 주검 위에 ‘식민언어’의 모래성을 쌓고 있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서 학자로, 지식인으로, 언론인으로 거들먹거리는 ‘이데올로기 청부업자’들의 말솜씨들을 더 비틀고 꼬집을까 한다.왜냐하면 ‘교육’은 이미 ‘말로 하는 것’으로, ‘책에서 배우는 것’으로 탈바꿈되고, 따라서 말길을 바로 열고 바로잡는 것은 벼랑 끝에 선 우리 삶을 되돌리는 지름길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윤구병 농부철학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