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2009년에 보낸 우리말 편지입니다.
[우연하다와 우연찮다]
안녕하세요.
유행가 노랫말에는 그 시대가 담겨있다고 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노랫말이 어찌 그리 꼭 제 맘 같던지요. ^^* 어제는 우연히 '우연히'라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는 '우연이'이더군요.
나이트클럽에서 우연히 만났네 첫사랑 그 남자를 추억에 흠뻑 젓어 함께 춤을 추었네 철없던 세월이 그리워... 뭐 이런 노랫말로 이어지는 노래 있잖아요.
오늘은 '우연히' 이야기를 해 볼게요. 우연히는 우연하다에서 온 말로 "어떤 일이 뜻하지 아니하게 저절로 이루어져 공교롭다."는 뜻입니다. 이걸 모르시는 분은 안 계실 겁니다.
그럼 '우연찮게'는 무슨 뜻일까요? '마땅히 우연하지 아니하다'는 뜻이겠죠? '우연하지 않게'가 줄어서 '우연찮게'가 되었으니 우연한 게 아닌 필연적인 게 우연찮다는 뜻일 겁니다. 이렇게 '우연하다'와 '우연찮다'는 정 반대의 뜻입니다.
근데 이상하게도 실생활에서는 우연하다와 우연찮다가 같은 뜻으로 씁니다.
어제 집에 가다가 우연히 초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어제 집에 가다가 우연찮게 초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위 두 문장 가운데 여러분은 어떤 게 더 자연스러운가요? 두 월(문장)의 뜻은 분명히 다른데 별다름을 못 느끼시죠?
'우연찮다'는 1992년부터 한글학회 우리말큰사전에 들어간 낱말입니다. 그때 오른 뜻은 "우연하지 아니하다의 준말"입니다. 곧, 우연하지 않은 필연인 경우에 쓰는 말로 오른 거죠.
몇 년 뒤 1999년 국립국어원에서 표준국어대사전을 만들면서 그 뜻이 바뀝니다. "꼭 우연한 것은 아니나 뜻하지도 아니하다."라고 풀어놨습니다. '꼭 우연한 것은 아니나 뜻하지도 아니하다.'는 말이 무슨 말이죠? 우연히 만났다는 건가요, 아니면 일부러 만났다는 건가요?
사전에 든 보기에 '그는 이번 사건에 우연찮게 연루되었다.'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 말은 그는 이번 사전에 연루되었는데, 꼭 우연히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뜻하지 않게 그렇게 되었다... 뭐 이 정도 뜻일 겁니다. 애매한 소리 잘하시는 정치인들이 쓰기에 딱 좋은 말 같네요. ^^*
편지가 좀 길어졌는데요.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은, 낱말을 만드는 것도 좋고, 한 낱말에 새로운 뜻을 더 넣는 것도 좋지만, 기존에 잘 쓰던 낱말의 쓰임까지 흐리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냥 국어를 전공하지 않은 제 생각입니다.
고맙습니다.
성제훈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