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최고의 사건이라면 역시 집 장만일까. 평범한 월급쟁이, 그것도 29살난 여자애가 수도권에 덜컥, 부모님 도움 받지 않고 작으나마 내 집을 마련한 것은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사건은 사건이다. 그것도 내게는 첫 집이니까 내 인생에 거의 기념이 될 만한 대 사건. 집도 샀으니 이제 결혼하자고, 남자친구와 화사한 미래를 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좋은 일에는 마가 끼는 것일까. 폭력에 방치, 그야말로 아동학대에 가깝게 아들을 괴롭히던 남친 부모가 나타난 것은. 집 장만하느라 대출받은 것을 빚이라고 트집잡고, 결혼하면 집도 내 월급도 다 자기들 것이라고 떠들고, 길바닥에서 사람을 두들겨 팬 것도 모자라 우리 부모님 댁에까지 쳐들어가 민폐를 끼쳤다. 결국, 결혼 이야기는 중단될 수 밖에 없었고, 그 일로 가족들과도 틀어진 나는 남친과 결혼을 할 수도, 가족들과 함께 살 수도 없게 되어 직장 앞으로 방을 얻어 나오게 되었다. 남친은 부모와 의절하기로 했지만, 그 부모는 직장에까지 쫓아와 난동을 부렸다고 했다. 악몽같은 몇 달이었다.
상담치료, 한의원. 그렇게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동안, 가계부나 통장, 돈 문제 같은 것은 신경도 쓸 수 없었다. 직장 앞에 학생 원룸에 월세를 얻어 나오고, 장만한 집은 세를 놓아 그 세를 받아 대출이자를 낸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몇 달만에 정신을 차렸을 때, 상황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결혼하면 같이 갚아나갈 생각으로 집도 장만했지만 지금은 일단 혼자 해결해야 했고, 월세에 생활비에 부모님 용돈까지. 살림살이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남의 빚 안 지고 끌고가는 것이 기적이었다.
나중에 결혼을 하더라도, 집은 이쪽에서 장만했으니 다른 비용은 네가 대라고 남친에게 말했다. 남친은 동의했다. 남친도 부모와 의절하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로 하며 조금은 어른이 되어 있었다. 엑셀로 가계부를 쓰고, 악착같이 저축을 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나였다. 생각 끝에, 전부터 쓰던 머니플랜을 조금 더 독하게 사용해보기로 했다. 그 좋은 기능을 제대로 못 살리고 대충대충 쓰고 있던 것을, 통장별로 수입처별로 수입을 나누고(본 직업 말고도 기고나 출판으로 부수입을 조금 얻고 있었다) 현금 사용을 최소한으로 자제했다. 지갑에 천원 한 장 없이 카드만 있다 보니, 군것질을 하는 등 소소하게 새는 돈이 줄어들었다. 카드 사용 내역은 주말마다 머니플랜으로 정리했다. 돈의 흐름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쓰러져 있던 몇 달 동안 붓지 못했던 펀드에 돈을 넣고, 조금씩 돈이 생길 때 마다 대출 원금에 단 10만원씩이라도 집어넣었다. 집 살때 엄마한테 천만원 빌린 것도 내년까지 갚기로 했다. 이 모든 일은 좋은 가계부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이 남친에게는 엑셀이요 내게는 머니플랜이었다.
2009년은 집을 장만한 최고의 해, 동시에 혼담이 엉망이 된 최악의 해였지만, 그 골치아픈 상황에서 조금씩 제 자리를 찾아나가게 된 것은 그야말로 좋은 가계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2009년은 아마도, 머니플랜이 없었다면 더욱 최악이 되었을지 모르는 해. 로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