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17] 우리말) 우연하다와 우연찮다

조회 수 2808 추천 수 89 2009.03.17 09:34:48
'우연하지 않게'가 줄어서 '우연찮게'가 되었으니
우연한 게 아닌 필연적인 게 우연찮다는 뜻일 겁니다.
이렇게 '우연하다'와 '우연찮다'는 정 반대의 뜻입니다.


안녕하세요.

유행가 노랫말에는 그 시대가 담겨있다고 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노랫말이 어찌 그리 꼭 제 맘 같던지요. ^^*
어제는 우연히 '우연히'라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는 '우연이'이더군요.

나이트클럽에서 우연히 만났네 첫사랑 그 남자를
추억에 흠뻑 젓어 함께 춤을 추었네 철없던 세월이 그리워...
뭐 이런 노랫말로 이어지는 노래 있잖아요.

오늘은 '우연히' 이야기를 해 볼게요.
우연히는 우연하다에서 온 말로
"어떤 일이 뜻하지 아니하게 저절로 이루어져 공교롭다."는 뜻입니다.
이걸 모르시는 분은 안 계실 겁니다.

그럼 '우연찮게'는 무슨 뜻일까요?
'당연히 우연하지 아니하다'는 뜻이겠죠?
'우연하지 않게'가 줄어서 '우연찮게'가 되었으니
우연한 게 아닌 필연적인 게 우연찮다는 뜻일 겁니다.
이렇게 '우연하다'와 '우연찮다'는 정 반대의 뜻입니다.

근데 이상하게도 실생활에서는 우연하다와 우연찮다가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어제 집에 가다가 우연히 초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어제 집에 가다가 우연찮게 초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위 두 문장 가운데 여러분은 어떤 게 더 자연스러운가요?
두 월(문장)의 뜻은 분명히 다른데 별다름을 못 느끼시죠?

'우연찮다'는 1992년부터 한글학회 우리말큰사전에 들어간 낱말입니다.
그때 오른 뜻은 "우연하지 아니하다의 준말"입니다.
곧, 우연하지 않은 필연인 경우에 쓰는 말로 오른 거죠.

몇 년 뒤 1999년 국립국어원에서 표준국어대사전을 만들면서 그 뜻이 바뀝니다.
"꼭 우연한 것은 아니나 뜻하지도 아니하다."라고 풀어놨습니다.
'꼭 우연한 것은 아니나 뜻하지도 아니하다.'는 말이 무슨 말이죠?
우연히 만났다는 건가요, 아니면 일부러 만났다는 건가요?

사전에 든 보기에
'그는 이번 사건에 우연찮게 연루되었다.'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 말은
그는 이번 사전에 연루되었는데, 꼭 우연히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뜻하지 않게 그렇게 되었다...
뭐 이 정도 뜻일 겁니다.
애매한 소리 잘하시는 정치인들이 쓰기에 딱 좋은 말 같네요. ^^*

편지가 좀 길어졌는데요.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은,
낱말을 만드는 것도 좋고, 한 낱말에 새로운 뜻을 더 넣는 것도 좋지만,
기존에 잘 쓰던 낱말의 쓰임까지 흐리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냥 국어를 전공하지 않은 제 생각입니다.

고맙습니다.

성제훈 드림
  

아래는 예전에 보내드린 우리말편지 입니다.


[유감에 유감]

어제치 조선일보(2006. 9. 26.) A2 맨 아래 오른쪽에 보면,
'바로잡습니다'라는 꼭지의 작은 기사가 있습니다.
내용은
'22일자 A1면 기사 중 '검찰총장이 21일 공개적으로 유감(有感)의 뜻을 밝히고'에서 '유감'의 한자는 '有感'이 아니라 '遺憾'이므로 바로잡습니다.'입니다.

어이가 없더군요.
좋게 한글로 쓰면 될 것을 뭐 잘 보일 게 있다고 굳이 한자를 덧붙여서 그런 망신을 자초하는지...
이런 게 바로 멍청한 짓입니다.

국어사전을 뒤져보면 유감은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으로,
유감을 품다, 유감의 뜻을 표하다, 내게 유감이 있으면 말해 보아라,
우리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데 대해 유감으로 생각합니다처럼 쓴다고 나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유감천만(遺憾千萬)을 실어놓고,
"섭섭하기 짝이 없음"이라 풀어놨습니다.
곧, 유감은
어떠한 상황이 마음에 차지 않아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이 있을 때 쓰는 말이라는 겁니다.
국립국어원에서 만든 표준국어대사전에 그런 풀이가 있으니,
떨떠름하기는 해도 써도 되는 말이기는 합니다.

좀 삐딱하게 나가볼까요?
유감은 흔히 정치인들이 쓰는 말입니다.
이 유감은
앞에 보인 것처럼 내가 남에게 섭섭한 마음이 있을 때도 쓰고,
남이 나에게 그런 마음이 있을 때도 씁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 유감이란 말을 언죽번죽 지껄이며
서로 대충 봐주고 일을 흐리멍덩하게 넘기는 것이죠.
이런 것을 보면
한자말은 남을 속이고 자기를 감추는 데 잘도 쓰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한자를 쓰는 게 무슨 대단한 것이나 된것처럼 행세하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입니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두루뭉술하게 돌리지 말고 솔직하게 사과하면 됩니다.
일부러 이상한 한자말을 써서
어떻게 보면 사과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또 어떻게 보면 자기 위신을 세우려 하면 안 됩니다.

저 같으면 유감을 이렇게 바꿔쓰겠습니다.

우리말 홀대, 외래어 홍수 유감 -> 우리말 홀대, 외래어 홍수 씁쓸
대법원장 '검찰.변호사 비하성 발언'관련 유감표명 -> 대법원장 '검찰.변호사 비하성 발언'관련 사과
국민에게 비쳐질 수 있어 유감으로 생각한다 -> 국민에게 비칠 수 있어 미안하게 생각한다
자신들의 느낌에 의해 기사를 쓴 것은 유감 -> 자신들의 느낌에 따라 기사를 쓴 것에 불만
보도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면서 -> 보도에 대해 섭섭함을 나타내며
유감을 표명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 사과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장삿속 시정 유감천만 -> 장삿속 시정 떨떠름

요즘 우리말편지가 자꾸 길어지네요.
될 수 있으면 짧게 쓰려고 하는데, 글을 쓰다 보면 저도 모르게 길어집니다. 할 말이 많아서...
저도 모르게 우리말편지가 길어진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아니, 아니, 다시 할게요.
저도 모르게 우리말편지가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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