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2007년에 보낸 우리말편지입니다.
[대충 잘 하라는 게 어때서?]
어젯밤 11시 22분, SBS 야심만만에서 '야구 시합'이라는 자막이 나왔습니다. '시합'은 일본어투 말로 국립국어원에서 '겨루기'로 다듬은 말입니다. 겨루기가 낯설면 '경기'라고 쓰시면 됩니다.
11시 23분에 '왕년에 한가닥'이라는 자막이 나왔습니다. "어떤 방면에서 썩 훌륭한 재주나 솜씨"는 '한가닥'이 아니라 '한가락'입니다. '한가닥'은 대한민국 국어사전에 없는 낱말입니다.
11시 29분에 여자친구에게 [채였다]고 출연자와 사회자가 말했습니다. 다행히 자막에는 '차였다'고 제대로 나왔습니다.
아무리 오락 방송이라고 하지만 해도 너무하는군요. 제 눈과 귀가 짜증을 견디지 못해 그냥 텔레비전 끄고 잤습니다. ^^*
오늘은 우리말을 좀 곱씹어 볼게요.
제 일터에는 저와 함께 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제 짝꿍 정희 씨가 저에게 "이것을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으면, 저는 항상 "대충 잘~"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남들이 들으면 웃습니다. 왜 웃죠?
'대충'은, 부사로 "일의 뼈대를 추리는 정도로."를 뜻합니다. 일이 대충 정리되다, 일을 대충 끝내다, 범인의 윤곽을 대충 파악하다처럼 씁니다. 일의 벼리를 챙기는 것이지 결코 얼렁뚱땅 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일을 '대충 잘'하라고 하면, 일의 뼈대를 추려서 잘하라는 말이 됩니다. 근데 왜 웃죠?
대충을 두 번 쓴 '대충대충'도 그렇습니다. 대충대충은 "일이나 행동을 적당히 하는 모양"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일이나 행동을 '적당히' 하는 모양이 뭐죠? 슬쩍슬쩍 넘어가는 모양인가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듣는 '적당'이 무척 서운하게 생각합니다. ^^*
적당(的當)은 "꼭 들어맞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행동을 적당히 하는 것은, 그 상황에 꼭 들어맞게 하는 알맞은 행동을 말합니다. 근데 왜 '적당히'라고 하면 슬렁슬렁을 떠올리죠?
다들 그러시니, '적당주의'를 사전에서 "일을 어물어물 요령만 피워 두루뭉술하게 해치우려는 태도나 생각."이라 풉니다. 이쯤 되면 '적당'이 서운해서 울 정도가 됩니다.
'적당히'는 결코 일을 얼렁뚱땅, 알랑똥땅, 엄벙뗑 넘기는 게 아닙니다. ^^*
제자 자주 쓰는 '대충 잘'을 곱씹어 보면 이렇게 깊은 뜻이 있습니다. 제 말에 틀린 게 있나요? ^^*
내일은 '잘'을 더 파 볼게요.
우리말123
보태기) 굳이 따지고 싶지는 않지만... 적당(的當)은 "꼭 들어맞음"이라는 뜻이고, 적당(適當)은 "정도에 알맞다."는 뜻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