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비가 오니 좀 낫죠? 처서에 비가 오면 흉년이라지만, 가뭄을 달래주는 이번비는 고맙네요. 오늘부터 모기 입도 삐뚤어진다고 하니 더위는 이제 한풀 꺾이나 봅니다. ^^*
오늘은 중국 소식을 전해 주시는 '내 사랑 중국' 카페에 실린 글을 소개합니다. 좀 길지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입니다.
우리말의 재발견/ 한국 아이들 '중국어식' 우리말 박정태 | 선양세무외국어학원 원장
우리 아이들 '바른말 고운말' 쓰고 있나? 중국 현지에서 태어나 자란 한국 아이들, 또는 어린 시절부터 죽 중국 학교에 다닌 한국 아이들은 일단은 바이링걸(bilingual)이긴 한데 일상에서 대체로 중국어로 표현하기를 손쉬워하는 반면 한국어 사용을 어렵고 불편하게 여긴다. 여기서 몇 세대를 거친 재중동포 아이들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이들이 평소에 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매우 중국어스러운(혹은 조선어스러운) 한국어 표현을 하고 있음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오늘 비 온다 그랬어?”를 “오늘 비 있다(有) 그랬어?”로, “아무도 없어”를 “누구(誰)도 없어”로 표현한다. 생활환경이 이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 같다. 청소년 유학생들이나 재중동포와 오래 같이 생활한 일부 성인들의 말투에서도 가끔은 이런 식의 표현을 들을 수 있다.
중국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런 아이들은 한국어와 중국어의 상황별 표현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할 때도 꽤 많다. 중국어에서는 ‘셰셰(謝謝)’에 예외없이 상대방이 ‘부커치(不客氣, 혹은 비에커치/타이커치러)’로 대답하는데 반해 한국어에서는 ‘별 말씀을’, ‘뭘요’로 대답하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그저 ‘감사합니다(고맙습니다)’로 되풀이해 회답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즉각적인 답변이 나오지 않는 사이 상대방으로부터 예의가 부족한 아이로 지레 오해를 사기도 한다.
“나랏 말쌈이 듕귁에 달아 서르 사맛디 아니할 새 이런 전차로 어린 백셩이 니르고자 홀 배 이셔도 제 뜻을 시러펴디 못하니……” 아마 세종대왕님께서는 한글 창제 이후 60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이곳 듕귁땅 선양에서 새삼스레 한글과 중국어가 마구 뒤섞이는 이런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질 줄은 모르셨을 게다. 한글도 기미독립선언문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같은 시절을 겪기도 했지만 그건 100년 전의 이야기이고, 외래어를 들여와 어휘를 풍부하게 하는 것과 표현 방법 자체가 왜곡되는 건 전혀 다른 사안이다.
한국어를 외국어로 열심히 배워 비교적 매끈하게 구사하는 중국 학생이 이야기한다. 한국어의 경어체가 정말 어렵다고……. 중국어에 없는 어미변화만 해도 익히기가 쉽지 않은데 그 어미변화의 상당부분이 경어체와 엮여 있으니 힘들기도 할 것이다. 외국인이 존칭어미인 ‘-(으)십시오’, ‘-(으)세요’를 비롯해 상대적 존칭인 ‘-게/세/나’를 거쳐 반말어미 ‘-아/어라’, ‘-아/어’를 모조리 익혀 상황에 맞춰 쓰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아이들이 중국어로, 혹은 중국어식으로 표현하는 걸 쉽게 여기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뜻글자이기 때문이다.하나의 글자 하나의 발음만으로도 의사 전달이 가능하기 때문에 한자나 중국어를 익힌 친구사이라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극단적으로는 “바빠?”가 “망(忙) 해?”로 처절하게 변신하기도 한다. 물론 영어를 사용해 “계속 고(go) 해” 하는 것과도 같지만 뜻글자는 훨씬 더 보편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언젠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어떤 삐딱한(?) 재중동포 지식인으로부터 한글을 폄하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글 문장에서 한자로 바꿀 수 있는 단어를 몽땅 다 한자로 바꾸고 나면 기껏 조사 외에 뭐가 남느냐는 것이었다.그냥 듣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소리글자는 뜻글자처럼 요리 자체가 아니라 요리를 담는 그릇에 비유할 수 있어서 영어든 중국어든 스페인어든 뭐든 다 담을 수 있는 이치이니 뜻글자의 틀에다 소리글자를 꿰어 맞추지 마시라고 점잖게 일러 주었다. 그리고 한글 시 한 편을 소개해 주었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최영미 님의 ‘선운사에서’이다. 그에게 예로 들려준 내 뜻은 한글은 한자를 포함한 외래어를 거의 또는 전혀 쓰지 않아도 되는 기능을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즉 자체로 충분히 요리가 되기도 하지만 어휘의 풍성을 위해 그릇이 되기도 하는 한글의 유연성이었다.
외국인이 배우기 어려운 언어는 결코 과학적이지 않다거나 정형화되어 있지 않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언어 고유의 표현체계가 다양하게 잘 발달되어 있다는 뜻이고 그런 까닭에 단순하지가 않아서 익히기가 어려울 뿐이다.그리고 언어 간 친근성의 문제도 있다. 한국인이 러시아어나 아랍어보다는 일본어를 상대적으로 익히기 쉬운 이치이다. 한국어와 중국어는 언어 자체의 친근성은 없지만 두 나라가 긴 세월 어깨를 겯고 역사를 공유하다 보니 한국어 안에 한자어라는 무시할 수 없는 분량의 어휘 공간이 생겼다.
이미 내장된 공간을 새삼스레 구태여 거부할 필요는 없다. 충분히 활용하면서 어휘의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러나 한글 고유의 언어체계나 일정한 표현방식에 어긋나는 표현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어느 선생님’을 ‘누구 선생님’, ‘약을 먹었다’를 ‘약을 마셨다’로 표현하는 일본어식 표현은 일본어로 구사할 때는 정상이지만 한글로는 이상할 수밖에 없다.
모름지기 한국 아이라면 ‘고생을 먹었다(吃)’가 아니라 ‘고생을 했다’, ‘감동을 먹었다’가 아니라 ‘감동을 받았다/했다’로 표현할 때 정상적인 한국어 언어체계를 가진 한국 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외국환경에서 외국어에 매달리다 보니 불안정해진 한국어 언어체계를 가지게 되었거나 별 생각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중국어스러운 표현을 하는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런 글을 쓰고 있는데 복도 저편에서 또 이런 한국말이 들려온다. “우리 내일 빤톈(半天, half time)이야?” 하아,그것 참! 얘들아, 이럴 땐 될 수 있는 대로 ‘오전수업’이나 ‘단축수업’이란 말을 쓰렴. 그래야 중국어를 배우지 않은 한국 친구들도 알아들을 수 있지 않겠니? | |